무용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작되었으며 생리학적인 사실과 함께 인간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던 시간부터 춤은 이루어졌고 그 움직임이 시작되었던 태초로부터 춤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르네상스를 우리는 문예부흥이라 말한다.

발레는 르네상스가 낳은 예술중의 하나이며 르네상스시대에 이탈리아의 궁정 연회에서 탄생 되었고 남자 무용수들에 의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당시의 무언극과 가면극의 춤을 구성한 당스 피귀레라고 하는 기하학적인 형태로 무용수가 모여서 추는 춤을 말하며 발리 또는 발레티라는 일종의 사교 댄스, 극적인 성격을 갖춘 무대무용인 브란디, 모리스카라는 즉흥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무대무용 등 4가지 춤이 혼합하여 발레가 되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출생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프랑스의 앙리 2세의 왕비가 되어 프랑스 궁정에 조국 이탈리아의 궁정발레를 소개하였고 이것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간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즉 발레의 모체는 이탈리아이지만  프랑스 왕과의 혼인으로써 프랑스에서 발레를 보급하게 되었고프 체계적인 발레학교가 설립되면서 세계적으로 발레 용어는 불어를 사용하고 있다

루이 14세는 춤추는 것을 좋아했고 뛰어난 소질을 가진 왕이었다. 7세부터 춤을 추기 시작하였고 1651년 12세의 나이에 처음 무대를 밟은 사람이다. 루이 14세는 본인이 원한데로 체계적인 발레 학교를 세움으로써 정돈된 발레 교육이 시작되었고 많은 발레교사를 등장 시켰다.

그는 평생 동안 발레를 사랑하고 발레리노로써 무대활동을 하였으며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하였고, 재능이 뛰어난 예술가를 수없이 궁정으로 초청했으며 또 그들은 발레의 발전에 기여했다.

루이 14세는 무용가의 양성기관으로 1661년 왕립무용학교(Académie Royale de Dance)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현재의 국립음악무용 아카데미, 즉 파리 오페라극장의 전신이었다.

최초로 여성 무용가가 여역을 연기한 것은 1681년이었다. 그 때까지 여역은 젊은 남성이 맡고 있었으나, 륄리의 “사랑의 승” 에서 라 퐁텐이란 제1무용수가 처음으로 앙상블의 리더로 출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파리 오페라극장의 안무가 피에르 보샹은 클래식 발레의 기초가 된 ‘발의 다섯 가지 포지션’을 창안했고 무용보(舞踊譜)도 발명했다. 이것은 마치 음악의 악보와 마찬가지로 무용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여건하에 무용교육을 받은 직업적 무용가가 등장함에 따라 무용기술도 급속하게 진보하였다. 장 발롱은 도약(pas d’élévation)의 기술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남성무용수들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마치 TuTu(튀튀)와같은 의상을 입었고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인 표정을 한 가죽 가면을 쓰고 등장인물의 역할을 연기한 것에 불과하다. 1726년 파리에서 데뷔한 마리 카마르고는 고전무용의 기술사상 가장 중요한 개혁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앙트르샤와 카브리올 등에도 뛰어났고, 남성이 하던 도약을 해냈다. 특히 그녀는 스커트를 짧게 입었는데, 즐겨서 춘 춤은 줄거리가 없다는 뜻의 디베르티스망으로 미뉴에트 ·그랑테 ·사라반도 지크 등과 같은 일련의 독무였다. 이 카마르고와 쌍벽을 이루었던 마리 잘레는 디베르티스망으로 만족하지 않고 음악과 의상과 무용을 종합하려고 애썼다. 따라서 이들은 다 같이 철저하게 의상의 개혁을 이룩하였다.

더 나아가서 노베르는 18세기 후반에 당시 발레에서 노래와 낭송을 모두 배제하여 시종일관 드라마로 엮어나감으로써 오늘날의 발레의 원형을 세웠고 가면도 폐지하였다.

가에타노 베스트리스는 클래식 발레의 꽃인 그랑 즈떼(jete)를 발전시켰으며 1770년경에는 안나 하이넬이 한쪽 발의 회전, 즉 피루엣을 출 수 있게 되었다.

1811년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의 안무사가 된 S.비가노는 의도하는 바를 여러 작품으로 무대에 상연하였고, 무용가의 개성을 중시하여 연극에서 연출가의 경우처럼 무용가를 다루었으며 군무의 동작도 고쳤다. 특히 그의 제자인 브러시스는 발레의 교육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많은 저서를 펴냈고  타이즈가 발명되어 도약의 기법이 더해진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19세기 초에 유럽을 휩쓴 낭만주의 정신은 발레에도 흘러들어와 1830년대부터 로맨틱 발레가 개화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음악 ,문학 ,회화에서 낭만주의를 꽃피운 위대한 예술가가 있었던 것처럼, 발레에서도 일대를 풍미한 M.탈리오니는 포앵트 기법을 써서 공중에 두둥실 올라가는 듯한 인상을 주어 관객을 사로잡았다. .탈리오니는 32년에 상연하여 발레사상 새로운 시대를 연 “라 실피드”(La Sylphide)는 그녀가 없었으면 나올 수도 없었다고 회자한다.

로망티슴의 지상 화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빈 출생의 F.엘슬러가 탈리오니의 경쟁자로 등장하여 로맨틱 발레는 더욱 풍부한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26세 때 파리에서 “절름발이” 등에 출연하여 크게 인기를 끈 엘슬러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을 순회하고 탈리오니가 러시아에 있는 동안에, 파리 오페라극장에서는 또 한 사람의 스타가 탄생하였는데, 바로 낭만발레의 대표격인 "지젤"을 연기한 C.그리시이다.

그녀의 춤은 공중적인 탈리오니, 지상적인 엘슬러를 동시에 갖추어, 말하자면 로맨틱 발레의 두가지 요소를 합친 것이었다. 이 세사람의 발레리나는 당시의 발레계를 주름잡으며 파리 이외에도 미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덴마크 등지를 순회하여 발레의 기법과 전통을 심었으며 오늘날 업적을 남긴 무용가로도 칭송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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