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는 호족들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히대의 영웅인 쇼토쿠태자(聖德太子)에게 섭정을 맡김으로서 아스카시대를 꽃피운 최고의 천황, 우리 눈앞에 보여지는 동산하나가 그녀가 누워있는 유택이다. 어찌 보면 그녀의 치적을 통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위대한 왕이라 칭송할 런지 모르지만 정치현장의 한복판에서 수없는 난관과 역경을 이겨내며 외로움을 달래고 살았을지 모르는 여왕! 혹은 한 남자의 평범한 아내로 살기를 꿈꿨을지도 모르는 그다지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았을 위대한 천황! 그녀에게 후대의 일본인들이 화려한 능묘 하나 복원해 주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무한그루 풀 한포기 건드린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문화재 주변과 비교하면 너무도 상이하여 슬픈 모습이다.
 
추고천황의 주변산세는 처음 와본 곳이지만 왠지 모를 친숙함이 느껴진다. 주변의 밭들과 논, 그리고 뒤쪽의 산들이 마치 향교고개를 넘어 남한산 밑쪽의 감이동 지역에 와 있는 착각이 일 정도이다. 나침반을 대어 보니 우리 일행이 있는 추고능은 서쪽이고 뒤쪽으로 보이는 산은 정동을 가리킨다. 바로 그 동쪽의 산 사이로 난 죽내가도를 넘으면 분지사이에 자리 잡은 원 아스카가 자리하고 있어 묘하게도 우리지역과 닮았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게 하는 것이다. 혹 감이동 지역이 초기백제의 도읍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해보게 되는데 그것은 감이동에 분포된 백제관련 지명들과 그곳에서 서쪽에 방이, 송파동의 고분군들이  분포되어 있는 것이 묘하게도 일치하고 있다.

백제초기 북방에서 내려온 온조세력은 감이동지역에 책을 설치하고 풍납과 몽촌토성을 제1, 제2 방어선을 구축하여 도성으로 활용하다가 고구려와의 잦은 마찰로 위협을 느낀 백제 왕조는 금암산과 이성산을 제3  방어선으로 하여 현재의 고골지역으로 도성을 옮긴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이는 삼국사기 기록의 근초고왕조에 고구려의 평양까지 올라가 고국원왕을 죽이고 다시 회군한지 얼마 후 한산으로 도성을 옮겼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왠지 모를 추측을 낳게 한다. 더욱이 현재 우리일행이 서있는 이곳 근 아스카를 개척한 백제의 도래인들은 외세의 그다지 큰 위협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금암산, 이성산과 비슷한 동쪽의 금강산, 이상산을 넘어 원아스카에 백제의 문화를 만들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그들의 본 뿌리인 한반도 한성백제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에 더욱 그런 추측을 짙게 하는 것이다.

다시 버스에 오른다. 마이크를 잡은 여행사 서사장님의 안내 멘트에 좀 전의 궁금증이 동시에 사라진다. 일본은 오사카 주변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천황능으로 추정되는 유적은 발굴을 금하고 있다고 한다. 인덕과 추고능이 수풀이 우거진 채 그대로 보호되고 있는 이유이기는 하나 왜 이런식의 문화재 보호 정책을 써야만 하는 것일까? 일본의 고분은 발굴만 하면 백제 양식의 유물이 쏟아져 나와 발굴을 하지 않는다고 언젠가 들은바 있다.

정말 그런 것일까? 어쩌면 정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언젠가 고성의 대가야 유적을 답사할 때 그곳의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대가야 고분 거의 모두가 도굴되어 모든 유물을 트럭 몇십대 인지 몇백대인지에 나눠 싫고 일본으로 옮겨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옛 어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이긴 하지만 비단 가야고분에 국한된 이야기 많은 아닐 것이다. 부여, 공주, 경주, 김해, 고성 등 옛 왕도가 있던 어느 지역 어디를 막론하고 고분이 산재한 양에 비하면 박물관의 전시물은 상대적으로 너무도 초라한 이유가 이들의 도굴로 인한 유물의 부재와 훼손때문이 아닐까? 더욱이 일본인들은 총독부의 지휘 하에 한국의 문화재 및 유적을 조사하고 자료화하면서 고대 일본역사와 관계된 유물 및 유적에 대하여는 상당히 체계적이고 주도면밀하게 도굴하거나 훼손시켰을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모든 유적에서 유물의 빈도와 가치가 누구나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보잘것 없는 것이어야 그들이 오랫동안 공들여 만들어 왔던 고대사의 왜곡이 당위성을 갇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천황능을 발굴할 이유가 없다. 전국에 산재한 귀족들의 고분과 일반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의 양과 질만해도 박물관을 메우는데 손색이 없으며, 부여 공주의 박물관들 유물과 견주어 보아도 모자랄 것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천황능을 벗겨보고 파보지 않아도 당당한 것이다. 실제 우리일행도 한반도 내에서 고대백제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여 우리가 양질의 백제 문화를 흘려줬다는 타국인 일본 땅에 건너와 있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어찌하여 본국인 우리의 문화를 타국에 와서 찾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일까? 더욱이 백제의 700년 역사 중에서 500여년의 역사가 깃들고 일본의 화려한 문화를 전파해준 현재 우리가 서있는 이들의 고향, 한성백제의 위치조차 모르면서 여기에 와 무엇을 물으려 하는 것인지 부화가 끓어 흥분이 가라않질 않는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낯설지 않은 풍경과 연한 분홍색의 매화꽃 많이 끓어오른 감정을 순화시키고 있다.  
석양이 질 때 도착한 예복사(叡福寺), 근 아스카에 노을이지고 있다. 오늘은 석양이 뜨겁게 느껴진다. 긴 하루의 피곤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붉게 물든 석양이 몽환의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이곳이 그리 오래도록 보고 싶었던 일본 최고의 정치가이자 화려한 일본문화를 끌어낸 성덕태자의 유택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 지은 절이다.
 
성덕태자! 용명천황(요메이천황)의 아들. 추고천황의 조카이자 사위로 섭정을 하면서, 정치,경제, 사회, 문화 등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던 중심인물! 후일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하는 다이카개신의 선구자! 귀족들의 갖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가씨와 함께 불교문화의 개화를 열었던 영웅, 그가 여기에 잠들어 있다. 어디가 묘이고 어디가 숲인지 알 수 없고, 넓이와 높이를 헤아릴 수 없는 커다란 동산, 그 숲에 성덕이 묻혀 있는 것이다.

아주 화려하지 않으면서 깨끗하게 정리된 정원과 마당,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좌향을 고려하여 배치한 건축물의 모습이 마치 성덕태자 생전, 정치와 문화를 동시에 반석위에 올려놓았던 그의 치적을 예복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하는데 어디선가 날아든 까마귀 한 마리가 텅 빈 공허한 하늘을 울부짓다 숲으로 사라진다. 
 
일행이 성덕태자의 묘 앞에 참배를 하고 내려오는데 석양을 먹고 있는 2층 목탑이 서 있다. 여러 해 답사를 다녀봤지만 2층 목탑을 알현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정말 아름답다.

붉은 주황의 석양 노을을 뒤로하고 자신의 화려한 자태를 감추려는 듯 검은 실루엣만을 드러낸채 우뚝서있는 목탑은 마치 성덕태자의 현신인향 신비롭기 까지 하다. 그 주위로 천살도 훨씬 넘었을 고목들이 나름대로 자태를 뽐내며 경내 구석구석을 장식한다. 또한 금당을 비롯한 건축물들이 조선의 기와를 올린 가구식 건축을 옮겨다 놓은 것 마냥 우리와 너무도 흡사하여 정겹다. 백제의 건축양식을 따라 축조하였다고 하는데 오래전 우리 한반도 백제지역의 건축도 이러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비교해 볼 대상이 없이, 이렇게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와서야 우리의 과거 모습을 유추하여 본다는 현실이 슬플 뿐이다. 천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진 성덕태자와 법당에라도 들어않아 가부좌 틀어 않고 찻잔 기울이며 3박4일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천여년 이상의 세월동안 그의 후손들이 남겨놓고 가꾸어온 이 절집의 자태로만 짧은 교감을 나눈 다는 것이 너무도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 뿐 이다.
 
태양이 서산을 넘어서 짓 붉은 여운만을 남겨놓은 평화로운 예복사를 뒤로하고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를 향하여 발길을 옮긴다.      

오늘 마지막 일정은 곤지를 모신 비조호신사(飛鳥戶神社)다. 작은산의 언덕을 넘어 산잔의 밭들과 논들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예복사에서 본 석양은 자취를 감추고 옅은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우측으론 마을을 관통하는 작은 도랑이 있고 그 너머로  비닐하우스를 씌운 포도 과수원이 늘어서 있는데. 우리지역의 하우스와는 상당히 모양새가 달라 이채롭다. 왼쪽으론 민가 들이 언덕을 등지고 줄지어 자리를 잡고 있는 그 한가운데의 소로를 따라 마을로 내려 가다보면 중간 즈음에 아주 조그마한 신사가 자리하고 있다.

너무도 작고 협소하여 신사의 명성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이곳이 그렇게도 보고 십고 찾고 싶었던 꼬박 하루의 낯을 다 보내고 찾아온 곤지왕의 신사이다. 너무도 허탈하고 공허하다. 신사의 주인 곤지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에 있어 여러 추측과 이견을 갖게 하는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백제신찬〉에 의하면 곤지는 무녕왕과 동성왕의 아버지고 한성백제의 마지막 왕인 개로왕의 동생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문주왕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일본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여하튼 곤지는 개로왕의 주선으로 송나라로부터 정로장군 좌현왕(征虜將軍左賢王)에 봉해지고 2년뒤인 461년 자기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곤지왕에게 주어 함께 일본으로 보내게 되었다 한다.

현재의 윤리관으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으로서 어떻게 왕인 본인의 아내를 곤지에게 주어 일본으로 보낸다는 것인가?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김운회 교수의 견해를 잠깐 생각해 보면 그 의문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것은 개로왕 즉위이후 계속된 고구려의 침공으로 불안한 정국의 백제 입장에서는 혹 만약 왕통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경우의 수에 대비하여 왕의 혈족들을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키움으로서 왕가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 판단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만약 본국의 왕이 서거할 경우, 보다 안전한 지역에서 살아남은 왕족을 중심으로 다시 국가를 부흥시킬 수 있는 강력한 정통성의 징표로서 왕족의 분산양육(分散養育)을 선택한 것이 리라. 후일 실제로 현실이 되어 일어나는 한성백제의 멸망을 염두에 두었던 개로왕은 본인의 처를 당시 고대의 결혼풍습이었던 취수혼(兄死取嫂婚-형의 사후에 그 처를 취하는)을 빌어 곤지에게 시행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것이다. 또한 그와 아울러 일본의 야마토 지역에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백제계의 확고한 지위와 열도 백제의 건설을 위하여 개로왕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던  곤지가 야마토 지배권을 위임받아 파견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여하튼 곤지왕은 후일 동성왕과 무녕왕의 아버지로서 제2의 백제중흥의 단초를 만드는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이며, 현재 우리가 서있는 이곳, 그가 성장기를 거치며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까지 뼛속 깊이 습득되어진 우리지역의 한성백제 문화를 오사카의 사카이 지역과 근비조에서 새롭게 태동시키는 매우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골 성황당의 당집만큼이나 비좁고 초라한 이곳에 만화의 주인공처럼 신이라 불린 사나이 곤지왕이 모셔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가슴아픈 일이면서도 이 작은 신사안에 모셔진 그를 알현하는 것이 우리일행에겐 또한 가슴 벅찬 일이었다.
 
지금은 초라하고 작은 이곳 곤지왕의 신사가 예전에는 마을 전체가 신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당히 큰 규모였었다고 하여 비조호신사속에 있는 역사적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더욱 놀랍게 하는 것은 공주 송산리 무녕왕릉에서 나온 목관의 재질이  비조호 신사가 있는 이 곳 고야산에서 집중적으로 서식하는 금송(金松)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백제와 왜, 그리고 무녕왕과 곤지왕에 대한 관계항을 정립하는데 단초를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의 이렇다 할 모범 답안 없이, 수 없는 추측과 추론만이 난무한 이유는 무엇일까?  슬프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일행은 위대한 곤지왕을 위하여 신사의 예법에 맞춰 방울을 흔들고 엄숙한 참배를 올렸다.
숙소로 가기위한 버스는 다시 언덕길을 돌아 이상산과 금강산 사이, 새로난 죽내가도를 향해 오른다. 비조호신사의 슬픈 여운 탓일까? 재를 넘는 버스의 무게가 두 어깨를 짓누루는 혼선의 무게만큼이나 무겁다. 천천히 고개를 오른 버스는 마루턱을 넘어 나라분지로 접어든다. 이상산 사이의 외부 풍경을 자세히 보았으면 좋으련만 어둠이 그를 숨기려는 듯 검은산의 실루엣 많을 드리우고 좀처럼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검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원비조(원아스카)의 불빛들이 환영이라도 하듯 우리를 맞고 있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서 여정을 풀었다. 첫날은 민박을 했다. 여러 방들의 사이에 놓인 문들만 아니라면 우리의 여느 시골 민박집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인 노부부의 온화한 미소와 상냥함은 그 민박집의 이름(若葉)처럼 긴장감을 내려놓아도 될 만큼 편안함을 갖게 한다. 노부부가 정성스레 차려낸 저녁식사는 아스카나베라는 음식이다. 우리가 먹는 샤브샤브와 같은 요리로서, 뽀얀 닭백숙국물에 배추와 버섯 등 여러 가지 야채를 살짝 익혀가며 먹는다. 맛이 담백한 것이 입에 맞아서 일까? 아니면 답사로 인한 시장함 때문일까? 식사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냄비의 바닥을 드러낸다. 소주 서너 순배를 돌리며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피곤들 하셔서 인지 아니면 몇 잔의 술이 취기를 오르게 한 것인지 시골의 어린이들 마냥 볼때기가 붉어진 일행들이 하나 둘씩 정해진 숙소로 사라진다. 답사 자료를 정리할 시간도 없이 아스카의 하루가 바쁘게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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