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11시 40분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모르게 푸른 하늘에서 파란 바다로 청용열차의 하강을 또 다시 느끼며 내려않은 곳은 바다위에 떠있는 오사카 간사이국제공항이다.

분주히 짐을 찾고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오른 일행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숲만 보이는 산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능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곳이 인덕천황릉(仁德天皇陵)이라 한다. 능의 전체 형태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워낙 크고 숲이 우거져 있어서 일행들의 눈에는 그냥 산일뿐이다.

단지 푸른 물결이 호수처럼 넘실대는 숲 앞의 도리이가 성스러운 곳임을 알리는 표식이 있을 뿐이다. 도리이가 보이는 앞의 전시모형과 자료를 본 후에야 그것이 거대한 인덕릉 임을 알 수 있었다. 중국의 선사 조주스님의 화두가 머리를 스친다. 「산은 산, 물은 물」능이라면 능이지 웬 말이 많냐는 듯 거대한 숲과 해자의 물이 조롱이라도 하는 듯하다.

기록에 의하면 인덕릉은 5세기 중반에 축조된 능으로 전체의 길이가 486m이며 원부 직경이 245m 방형의 폭이 305m인 세계 최대 면적인 전방후원분으로서 백제계 초대 천황인 응신천황 아들의 능이라 한다. 천황의 신비를 보호라도 하듯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어 세세히 둘러보지 못함이 못 내 아쉽다.

인덕릉에서 도로맞은편에 사카이 박물관(堺市市立博物館)이 있다. 사카이박물관에는 일본 고분시대의 전방후원분 무덤양식과 주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 등이 전시 되어져 있다. 전시자료를 통해 본 인덕릉은 3중 해자와 3단 높이로 구성 되어져 있으며, 2000여명의 사람들이 16년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놀라움을 갖게 한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벽면 한 칸을 가득 메운 사카이 주변의 항공사진에 전방후원분과 원분, 방분 등 99개의 고분유적을 표시하여 이곳이 일본 최대의 고분산지임을 실감하게 한다. 지난시간 일본은 이곳의 인덕천황릉을 비롯한 전방후원분의 묘재를 들어 일본고유의 묘제로서 한반도의 서남해(해남, 나주, 함안등)에 산재해 있는 전방후원분의 규모가 일본의 규모에 비하여 턱없이 작아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 한 바도 있어 입맛이 씁쓸하다.

묘제의 변천은 문화사의 전반에 걸쳐 가장 변화되지 않는 형식중의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왜 이곳에 산재해있는 고분들의 묘제가 일정한 형식이 아닌 여러 종류의 매장형식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일본의 고대역사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어왔던 터 이지만 일본이 주장하는 그들의 언어에 대하여 한반도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되었다는 이렇다 할 명확한 주장과 근거의 제시가 이루어 지지 못함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사카이와 같이 우리지역과 인접한 송파에도 고구려를 비롯한 여러 묘제가 산재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개발이란 미명하에 일부를 제외한 수없는 고분군들이 자료하나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현재로서는 그 정체성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닌 오늘날, 피라밋 보다 크고 진시황릉보다 넓은 인덕천황릉을 만든 그들에게 우리가 문화를 전파하였다고 감히 이야기 할 수 있는가? 하고 되물으면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우리스스로 역사를 등한시 하고 편리주의 많을 지향하여 우리의 역사를 스스로 아파트 숲에 묻어버린 작금의 사태가...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또한 제대로 된 주춧돌하나 발견되지 않고 도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유구 및 유물 또한 발견되지 않은, 부족연맹의 족장 정도나 거주하였을 아주 작으마한 풍납토성을 두고 한성백제의 수도라 하는 학계의 견해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본 오사카의 인덕천황능을 풍납동에 옮겨놓으면 성안의 반을 차지할 만큼의 규모를 만들어낸 일본인들에게 풍납토성에 거주하였던 한성백제인들이 문화를 전파하였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오사카에 발을 내려놓은 첫 번째 답사지 인덕천황능은 우리역사의 현실을 보여주며 슬픈 마음으로 동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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