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기념 동북 역사 탐방(마지막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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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기념 동북 역사 탐방(마지막편)
  • 뉴스투데이24
  • 승인 2019.07.2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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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숙의 중국답사기-"드디어 만난 안중근"

2019년 4월 28일 일요일 맑음 (단동-대련-여순-대련)

 
8시에 단동을 출발했다. 오늘도 5시간정도 이동할 예정이다.
단동은 옛 안동지역이다. 단동-서간도의 끝, 집안-단동, 간도는 사이 간, 섬도
백두산이 발원지인 큰 강은 두만강(만물의 시작), 압록강(변계=국경), 송화강(천하=하늘의 강) 황하문명은 모계사회, 요하문명은 요새 연구대상이다. 양자강이북을 북방이라 하고 북방지역은 불을 땔 수 있다. 양자강 이남은 남방이라하고 남방지역은 불을 땔 수 없다. 상해는 남방이므로 난방을 못한다.
 
*이주민 생활*
소수민족- 시장(티벳), 신장위그루, 왕석왕족, 영화 회족, 내몽고, 연변. 이중에서 나라가 있는 곳은 몽고국, 조선국뿐. 자치주의 필수조건-지정된 구역에서 그 민족이 차지하는 수가 30%이상, 그 민족의 언어와 교과서가 있어야 한다.(조선족은 북한교과서 사용) 연변만 한글을 쓸 수 있다. 88올림픽 이전에 연변에서 남한을 ‘해가 뜨지 않는 나라’라고 알려졌다. 88올림픽 때 남조선이 대한민국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88올림픽은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나 보다. 유행가도 대만 것만 불렀는데 올림픽 이후 남한 유행가를 부르게 되었다. ‘신사동 그 사람’, ‘싫다 싫어’ 등. 한국 드라마가 연변에 처음 들어오며 최진실, 최수종 주연의 ‘질투’ 주제가도 유행을 했다.
중국의 남성들은 살림을 하고 여성들은 일만하지만 아기 낳으면 젖을 주는 일만하는데 한국 드라마 ‘사랑이 뭐 길래’의 대발이 아버지를 보고 중국과 매우 다른 남성상에 모두 놀라 3번 앵콜 방송했다. ‘대장금’을 보면서 전통한식문화를 알게 되었다.
 
연변에서는 1990년대 이주 한국사람을 사기꾼으로 인식하였다. 동포사기사건을 소재로 ‘서쪽에서 뜨는 해’를 공연했다. 그 내용은 은희아버지가 남조선에 가서 돈 벌어 오려고 재산을 모두 팔아 브로커에게 줬는데 돈을 다 뜯겨 재산을 다 날리게 되었다. 화가 많이 난 엄마는 “서쪽에서 해가 떠야 집에 들어 올거야”하며 집을 나가셨다. 그림을 잘 그려 그림대회에 나갈 때 마다 상을 타던 은희는 학교에서 그림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은희가 상을 받지 못한 것을 이상하게 여긴 담임선생이 담당자에게 어찌된 일인가 물어 봤다. 담당자는 “그림은 아주 잘 그렸는데 제목을 ‘서쪽에서 해가 뜨는 날’이라고 해서 못주었다”고 하니 담임선생은 은희에게 “너는 해가 어느 쪽에서 뜨는지도 모르냐?”고 야단을 했다. 은희는 고개를 숙이고 울면서 자기 삶의 내용, 엄마 아빠보고 싶은 현재의 마음을 표현한 노래를 불렀다. 공연을 보던 500여명이 모두 울었다. 남한에 대한 선입견을 바꾼 것이 2002년 월드컵이다.
 
11시3분에 대련에 있는 비사성(천리장성의 시작)이 멀리 보인다.
 
여순은 랴오둥 반도의 남쪽 끝에 있으며 일년내내 얼지 않는 부동항이며 1878년 중국 최초의 현대적 해군인 북양 함대의 중요한 작전기지로 지정되었다. 1898년 러시아가 랴오둥 반도를 점령하여 조차권을 얻었고, 그들의 태평양 함대를 위해 포트아서를 요새화된 해군기지로 만들었다.
 
1905년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일본이 지배하였고, 1955년에 소련은 뤼순에서 철수하였고 귀순은 중국의 중요한 해군기지가 되었다. 서양식으로 설계된 아름다운 도시 뤼순은 동부의 구 도시에는 항구시설이 있고, 서부의 신도시는 주거지이다.
 
12시에 여순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안중근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여순일본관동법원구지’를 찾았다.
여순일본관동법원구지
여순일본관동법원구지

 

 
1907년에 세워졌고 일본 통치시기 일본관동고등법원과 지방법원으로 사용하였으며 수많은 중국의 항일지사, 공산당원과 한국의 민족영웅 안중근 등이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 해방된 후, 1947년 3월에 대련시 정부 전신인 관동공서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1952년 여순시립병원이 들어서고 후에는 여순구 구인민병원으로 사용하였다. 2001년 3월과 2002년 1월에 시급문물보호단위와 대련시 중점보호건축물로 선정되었으며 2006년 5월 대외적으로 법원구지 진열관과 애국주의 교육장소로 개방하였다.
안중근의사 사형선고받은 법정
안중근의사 사형선고받은 법정

 

 
1층 전시관 시작하는 글-1905년 러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대련을 점령하고 일련의 식민통치기구를 건립하였다. 1906년에 설립된 여순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은 식민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중요한 상징이었다. 칼 밑에서 벌어진 재판은 절대 공정할 리 없다. 전시는 역사에 대한 회고와 당시 모습을 복원하여 40년간 일본 식민통치의 죄상을 단면적으로 폭로하고자 한다.
고문도구
고문도구

 

 
*남만주철도주식회사-1907년 4월에 본부를 동경에서 대련으로 옮겨와 식민당국이 만주를 경영하고 동북경제를 약탈하기 위해 특수사명을 띠고 설립한 국책식민회사이다.
 
*포츠머스조약-1905년 9월 5일 일본과 러시아 양국은 미국에서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이로서 러일전쟁은 종결되었다.
 
러시아는 여순 대련조차지 및 그 부속권익을 일본에게 양도하였다.
일제가 대련에서 수탈한 물자는 양식, 석탄, 목재, 철등 1906년-1944년까지 만철이 약탈한 자본 총액은 50.9억 앤에 달했다.
고등법원법정에서 안중근의 법정심문이 진행되었다.
 
*찰스 모리머 기자가 쓴 공판관람기-영국의 더 그래픽지 1910년 4월 16일 “이 세계적인 재판에서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법정을 떠났다. 그의 진술을 통해 이토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하였다.”라고 기술하였다.
 
*안중근(1879-1910)황해도 해주출생, 국제평화주의 독립운동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일본 전임 수상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수감되었다가 여순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일본관동지방법원의 6차 공판 끝에 사형을 언도받고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한복을 입고 계신 사진이 꽃다발 속에 있다. 안중근기념사업회에 감사드리며 헌금을 하였다. 건물 가운데 2층으로 올라가는 작은 계단이 양쪽으로 있다 (소계단-모든 제소, 항소, 상소 안건의 “죄수”는 헌병경찰이 압송하여 이곳을 통해서 위로 올라갔다. 왼쪽은 “죄수”계단, 오른쪽은 방청객이 올라가는 계단이다.) 각종 고문기구들이 있는데 그 중에 가죽을 벗기는 것과 쇄신구(사람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분쇄하는 기구)가 있어 너무 놀라웠다. 인간의 잔인함의 끝은 어디일까?
 
‘맺는말-백여년 전의 국난과 항쟁의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시기의 역사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일본은 그 시기의 침략과 만행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각국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더 많은 경각심을 가져야 하고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개척해 나갑시다. 그리고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함께 기원합시다.’
안중근 수감됐던 방
안중근 수감됐던 방

 

 
3시 5분에 안중근의사가 수감했었고 사형을 당한 여순감옥에 도착했다. 입구를 들어서자 당시 감옥에서 겨울에 채소를 저장하는 저장실이 보인다.
 
머리말-20세기 초 러시아와 일본이 중국 여순에 건립한 감옥으로 우리 애국 동포와 항일지사를 수감하고 처형한 파시스트 감옥이다. 이러한 감옥의 역사는 근대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한 축소판이다.
 
1902년 여순감옥 건축
1907년 일본 통치 시기 관동도독부 감옥으로 사용하기 시작-감방, 의무감방, 검신실, 암방, 공장 등 건립을 점차 확대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여순감옥 해체
 
검신실- 수감자들이 공장에 가서 부엌 할 때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하였다.
 
안중근을 구금했던 감방 표시도 있다. 체포된 후 11월 3일에 이곳으로 압송되어 일본의 “국사범”으로 분류되어 간수부장 당직실 옆에 있는 이 감방에 단독으로 구금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감옥 교수형장에서 순국하였으며 그때 나이 32세였다.
 
캄캄한 암방이 4개있다. 밥의 양을 7등급으로 나누었다. 고문실은 조(弔)강(杠), 호랑이 의자 등 각종 고문도구가 있으며 구속되었지만 아직 판결을 받지 않은 수감자와 “감옥규칙 위반”자에게 잔혹한 형벌을 실행하였다.
 
당시 이곳의 주요 고문 수단은 “태형”이었다. 납으로 감싼 대나무로 수형자의 피부가 찢어지고 살이 터지도록 때렸다.
 
여순감옥에서 사용하던 일부유물(카메라, 되, 소형 저울, 계산기, 신문집게, 석유버너 등)들을 전시해놓았다-이것은 일본 식민통치 시기의 가장 사실적 증거이다.
작업 시간표
1월, 12월은 매일 6시간 30분
2월, 11월은 매일 7시간 30분
3월, 10월은 매일 8시간 30분
4월은 매일 9시간 30분
9월은 매일 9시간
5월, 8월은 매일 10시간
6월, 7월은 매일 10시간 30분
더운데 일을 더시키다니......
죄수들이 작업으로 발생한 수입이 해마다 많이 늘어났고, 예산보다 수입이 항상 많았다. 교회실도 있었는데 공개 혹은 비밀적으로 수감자의 사상동태와 행동을 조사하여 단체 혹은 개별적 방식으로 기만적이고 다양한 명목으로 교회 선전을 하였다.
 
감옥은 신문 잡지를 이용하여 침략전쟁을 위해 여론을 조장하였다.
이본 관동국요람이 공포한 1906년-1930년과 1940년 작업 수입표에서 볼 수 있듯이 1940년 한 해에만 감옥작업수입이 일화 20만 엔에 달했는데 이 금액으로 그 당시 밀가루 20만 포대를 살 수 있었다. 감옥 밖에서 부역하는 중국인은 족쇄를 차야했고,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는 쇠사슬로 같이 묶어야 한다고 감옥규칙을 정했다.
감옥의 내부를 보고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새파랗고 라일락이 활짝 피어 감옥의 의무계 주변이 라일락향기로 가득하다.
 
의무계-뤼순감옥의무계에는 보통병실 12칸, 격리병실 6칸, 및 진단실, 약제실, 화학실험실, 시체실 등이 있다. 동시 수용 환자는 40명이다. 주로 피감자에 대한 신체검사와 병세 치료, 심각한 형벌에 의한 상처 처리 등을 담당한다. 당시 중병에 걸려 일을 할 수 없는 피감자들은 이곳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은 뒤 바로 돌려보내져 일을 했다. 전염병에 걸린 피검자들은 격리병실에서 갇혔다.
 
의약품과 의료기기 모두 빈약하고 결함이 있어 중병이 있는 수감자는 형식적으로 치료할 수 밖에 없었다.
 
장복원 귀순의학전문학교의 회고와 기억-1944년 초 법의학 수업을 마친 후 임상실습을 하기위하여 법의학 교수 인솔 하에 우리 졸업반은 뤼순형무소 교수형을 참관하였다.
 
우영만의 증언-어느 날 내가 작은 의원에 편지를 보내는 데 내가 병실로 들어가 보니 그야말로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였고 어떤 환자들은 죽은 사람처럼 하나같이 죽은 듯이 바닥에 누워 있고, 몸 위와 아래는 온통 대소변이 있다. 몸 아래에는 수많은 구더기가 있었고 어떤 구더기들은 긴 꼬리가 자라 나 있었다.
 
*뤼순의학전문학교-1907년 일본 식민 당국이 원래 러시아 휘순 적십자병원으로 인수하였다.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1939년에 뤼순의학원을 뤼순병원 원내 설립하였다. 1943년 뤼순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1945년 8월에 이르기까지 155명의 졸업생 배출하였다.
 
*뤼순형무소회고-관리가 부실하였고, 위생이 엉망이어서 지저분한데다가 시체의 악취까지 겹쳐 떼를 지은 파리들이 철창 틈새를 뚫고 들어왔다. 역시 민감한 까마귀들이 병실 옥상에 무리를 지어 내려 앉았다.
 
황계장 뤼순의학전문학교의 회고와 기억-해방 전 뤼순의과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44년 3월 졸업 전 뤼순감옥 교수형장에서 돌아가며 교수형 장면을 본 것은 법의 실습이었다. 또한, 의과 전문학교는 항상 감옥에 있는 시체가 담긴 나무통을 학교로 가져다가 수강생들이 해부 실험을 할 수 있도록 하곤 했다. 감옥 의무계 의사인 고카쇼이치나의 동창이었고, 다른 한명은 장국재라고 불렀다. 그해 감옥에서 시신을 얼마나 가져가서 학생들이 실험했는지는 계산을 할 수가 없었다.
 
*사형장-1934년 감옥에서 이 비밀 사형장을 증설하였다. 사형선고 받은 수감자는 여기에서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700여명이 사형 당하였고, 여기서 사형당한 항일 투사는 헤아릴 수없이 많다
 
전 여순감옥 일본의사 고가 쇼이치가 기술한 교수형 집행과정-“여순감옥의 중형범들은 다수가 만주와 몽골에서 잡혀왔다. 사형을 집행할 때 어떤 때는 3명, 많을 때는 5-6명이었다. 사형에 임할 때 형무소장, 의사, 각 계장들 전체가 나란히 2층 계단에 서서 준비되면 사형수를 계단 밑에 끌고 와 수갑을 채우고 눈을 가린 후 형구를 씌워 연결고리로 목덜미를 단단히 묶는다.
 
경첩이 열리면 사형수가 이동식 나무판에서 떨어진다. 나는 게단 밑에서 대기하였다가 사형수의 심장 박동을 검사하고 즉시 형무소장에게 보고한다. 시체가 통에 담아 이동하면 다음 것을 기다린다. 비참하다! 정말로 비참하다! 이런 사형수와 시체를 마주 보면서 나는 내가 이런 직무를 담당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지 통절하게 느꼈다. 참말로 견디기 어려웠다. 교수형에 쓰이는 삼노끈은 아주 낡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를 빨았는지 증명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사형과정-얼굴에 복면을 씌우고 이동식 판에 무릎을 꿇게 한다.-목에 밧줄을 건다-간수가 이동식 판을 내려놓으면 사람은 허공에 매달리게 된다-검시 후 나무통에 넣어 묘소로 이동한다.
사형 후 나무통을 묻는 것
사형 후 나무통을 묻는 것

 

 
사형장은 2층으로 되어있는데 천정 위에는 여러 개의 밧줄과 고리가 있고 나무바닥 중간이 정사각형으로 잘려있고, 그 아래 나무통이 놓여있다.
 
나무통 속의 시신 모습은 몸이 접혀있어 굴신장과 같다. 사형장 바로 옆에 담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이문을 통과하여 그 밖의 공동묘지에 나무통을 묻는다. 이렇게 이름도 없이 버려졌으니 안중근의사의 시신을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뤼순의 국제지사들-안중근
뤼순의 국제지사들-안중근

 

 
사형장 아래에 ‘감옥묘지광경복원실’이 있어 그곳에 그런 그림이 있다. 귀순의 국제지사들의 동상과 사진들을 전시한 전시관이 있다.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유상근, 최흥식등
 
안중근의사 만 모신 곳이 있다. 동상과 사진에 꽃을 두르고 그 앞에 꽃 장식을 하였다. 청초당(풀이 푸르게 돋은 언덕-봄에 풀이 푸르게 돋아나듯 우리나라의 독립도 곧 다가올 것이라는 안중근의 염원을 담고 있다), 극락(지극히 즐거운 곳이라는 뜻-안중근의 신앙과 종교관이 나타난 글귀이다), 일행들이 모두 나가서 마음이 급해 얼른 사진만 찍고 나왔다. 먹먹함을 뒤로하고 다시 대련으로 향했다. 도로변에는 개나리꽃이 피어 온통 노랗다.
 
1시간을 달려 공항이 있는 대련으로 왔다. 성해광장(별이 바다를 이루는), 가장 부자동네(땅값이 가장 비싸다) 대련을 한 바퀴 돌아 숙소로 갔다. 호텔이 시내에 있고 가장 깔끔하고 좋은 곳이다. 다른 사람들은 밤에 나가서 중국 문화를 즐기려 하는데 나는 힘이 들어 일찍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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