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7일 토요일 맑음 (통화-집안-단동)

아침에 많이 춥다. 통화에서 집안까지 2시간 거리. 우리가 통화역과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잤는데 밤새도록 기차소리가 났다. 통화는 사통팔달의 중요 요충지로 먹고 자기에 알맞은 지역이다. 오늘은 집밖에서 집안으로 간다. 혼강(동가강) 옆 산은 옥황산인데 그 위에 귀신의 집이 있고, 집안은 강원도 기후와 비슷하며 교회가 가장 많은 지역은 변방(백두산부근), 두만강유역, 제일 큰 교회는 연길에 있다. 목사는 종교법에 걸려서 선교를 하지 못한다. 중국의 종교는 전통불교이다. 나라가 인정하는 중국의 4대 종교-불교, 기독교, 천주교, 도교

집안은 편안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소강남, 분지, 도읍을 할 만한 곳이다.
가이드는 태극권을 가르쳐 주겠다며 양팔을 벌려 움직이며 “큰 수박이 있습니다. 반 잘라서 오른 쪽 분들 반을 드시고, 왼쪽 분들 반을 드세요”한다. 내가 예전에 배웠던 타이치체조가 생각났다. 돈화부근부터 한글이 보이고 논, 밭에 매화가 피기 시작한다.‘내일은 없다. 내가 행복해야 남에게도 베풀 수 있다. ’득지원유‘-원하는 것을 얻으며 그 것이 원래 있던 것, ’실지본무‘- 잃어버리면 원래부터 없던 것.

통화를 출발한지 40분 후에 검문을 하고 8시 42분에 고구려 옛 채석장인 오녀봉 터널을 지난다. 우리의 시골풍경과 똑같아 보이는데 비닐하우스를 우리 보다는 작게 만든다. 소를 몰고 밭을 가는 농부가 보이고, 매화꽃이 피기 시작하였고, 수양버들잎이 약간 얼굴을 내밀었다. 논과 밭 사이의 집들은 모양이 일률적이고 지붕이 빨간게 예쁘다.
오녀봉휴게소에서 한번쉬면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우리가 다니는 곳은 모두 청정지역 같다.

10시 13분에 장군총에 도착했다. 예전에 호태왕릉과 장군총 주변은 과수원이 있던 곳으로 능을 복원하면서 주민들을 아파트로 이주 시키고 과수원을 하던 주민들에게는 앵두, 살구, 사과 등 과일을 팔아 생계를 할 수 있게 했다. 아늑한 느낌을 주는 장수왕릉 주변에는 온갖 꽃이 만발하여 너무 아름답다.

주차장에는 집안시에 있는 유적의 안내판이 붙어있다.

1. 장수왕릉은 일명 장군총이라고 불린다. 기원 5세기에 세워진 장수왕릉은 기존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석구조 능묘로 고구려 제20대 왕인 장수왕의 능묘이기도 하다. 외각은 뾰족한 방추형으로 동방의 피라미드라는 미명을 누리고 있다. 능묘는 계단식 돌방무덤, 평면은 정방형, 길이는 31.58m, 높이는 13.1m, 묘실은 4단과 5단 사이인 중심 위치에 있고, 묘지 위에는 50여 톤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가 있으며 바위 위에는 사당 같은 건축물이 있다. 무덤의 주변에는 10여톤이나 되는 큰 바위가 11개나 된다. 서남방향으로 200m 덜어진 곳에 제사 유적지가 있는데 부지가 5헥타르에 달한다.

2. 호태왕릉비-고구려 제19대왕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묘비로 해동 제일의 고비라는 미명을 가지고 있다. 414년에 세워진 묘비는 아들 장수왕이 부친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묘비는 각력응화암으로 만들어졌고 방추형으로 되어 있다. 높이는 6.39m, 너비는 1.34에서2m, 비석의 벽에는 한자 예서체로 된 비문이 총 1775자가 새겨져 있다. 그 중 확인된 한자가 1590자, 비문에는 고구려 건국신화, 초기 왕계, 호태왕의 영토 개척, 공적, 능묘의 관리 제도 등이 기록되어 있다.

3. 고구려 문화 유적 전시장이 집안시에 있다는 안내문

4. 우산귀족묘지-여러 곳의 고구려 후기 벽화 묘지가 있는데 그 중 5회묘 5호묘가 가장 대표적이다. 5호묘의 묘실은 장방형이며, 석면 위에 방위대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그려져 있다. 들보에는 반용이, 천정에는 신선, 구름, 별 등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벽화는 색채가 화려하고 곡선이 유창하며 내용이 풍부하여 고구려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를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동북예술의 보물로 불리고 있다.

5. 환도산성-고구려 초기와 중기의 유명한 성터 중의 하나이다. 국내성의 군사 수비성으로 세워진 환도산성은 고구려 시대 두 번이나 수도로 정해져 있어 고구려 역사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지역이기도 하다. 환도산성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삼태기를 방불케 한다. 둘레는 6947m,성벽의 구조는 자연 지리 환경을 충분히 활용하여 산성으로서의 건축적 특징을 살리고 있다.

장군총
장군총

 


여러 가지 들꽃들과 배꽃의 환영을 받으며 장수왕릉에 들어오니 2012년 7월에 봤을 때보다 많이 무너져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 곳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는 밝은 모습도...... 무덤의 뒤로 돌아 위로 올라가니 능의 바로 뒤에 팔각의 장수정(우물)이 나온다. 다시 내려와 5개의 배총(딸린무덤)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수왕릉1호 동반 무덤 앞으로 왔다. 이 무덤도 많이 무너져있다.

장수왕대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는데 장수왕릉이 왜 여기에 있냐는 질문이 많이 있었는데 고구려의 왕릉은 태어난 곳과 관련이 많다는 설명이 있어 그런가 보다하게 되었다. 이 주변에서만 보이는 둥그렇게 늘어진 나무의 이름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주차장에서 노란 사과와 애플망고를 파는 아기엄마가 있었다.

차를 타고 몇 분가지 않아 호태왕비에 도착했다. 일제가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단동까지 옮겼으나 실패하여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의 내용>
1. 제1면 1행-6행까지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왕까지의 역사
2. 제1면 7행-3면 8행까지 광개토왕의 정복 전쟁을 기술했다.
3. 제3면 8행-제4면 9행까지 능비의 건립 및 수묘인에 관한 내용

광개토대왕릉(호태왕릉)
광개토대왕릉(호태왕릉)

 

국강상 호태왕(광개토대왕)-국강 언덕 이름, 호태왕은 백성이 사랑한 왕 중의 왕
해동 제일의 고(古)비(碑)-유리벽 안에서는 아무 설명도 할 수 없고 비석을 바라만 볼 수 있다. 그 거대함과 수고스러움에 감동받고 능으로 발길을 옮겼다.
장수왕이 남하보다 북쪽으로 진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집안시내 고분이 12000-17000여기가 있는데 상당수가 도굴 당했다. 태왕릉을 제일 처음으로 도굴 당했는데 혹시나 하고 능을 많이 훼손했지만 특별한 유물이 나오지 않아서 장군총은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릉-고구려 제19대왕 호태왕과 왕비의 릉이다. 능묘의 계단은 돌무지로 쌓인 묘실이며 고분의 높이는 14m, 동쪽길이는 62.5m, 북쪽 길이는 68m, 서쪽길이는 66m, 남쪽 길이는 63m이다. 계단 8개, 21층으로 되어있고, 아래는 거대한 무덤돌이 있다. 묘실은 8계단에 있고 무덤길은 서쪽방향으로 되어있다. 묘실은 두 언덕물의 가옥 형상으로 나타내는 석곽이고 두 개의 석관상이 있다. 묘역에는 많은 조약돌이 깔려있고 동쪽에는 제단이 있다. 이곳에서 대량의 기와, 연꽃무늬와당, 그리고 ‘태왕릉이 산악처럼 견고하고 영원하기를 원한다’라고 쓰인 문자 벽돌을 발굴하였다. 중국의 안내문은 우리의 표현과 약간 다른 부분이 있으나 그대로 적었다.

광개토대왕릉은 예전에 본 모습그대로인데 현실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현실 안에는 두 개의 관대가 있다. 그 안에서 사진촬영이 불가하다. 공안이 항상 지키고 있다. 능위에서는 집안 시내가 다 내려다보인다. 능을 한 바퀴 돌면서 살펴보고 중간에 있는 길로 나오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제단 있던 자리를 보았다. 아까 안내문에서 장수왕릉의 제단은 능에서 2km거리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는 20m 되려나? 우리가 답사하는 동안은 날이 너무 좋다. 오회분 5호묘의 내부수리관계로 고구려 벽화를 못 봐서 아쉬웠다. 태왕릉을 나와 오회분을 차창 밖으로 보며 환도산성으로 향했다. 중국에서 수리중이라고 하면 수리중이라고 믿어야한다.

환도산성-위나암성. AD3년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쌓은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발676m에 위치하며 주변의 산을 보호벽으로 곡구를 대문으로 산중턱을 궁으로 하여 중국 전통의 “풍수지리설”의 이념을 충분히 살렸다. 산성의 방어는 견고하고 성내의 공간은 넓으며 자연이 아름다워 인류의 창의성과 자연과의 완벽한 융합을 자랑하고 있다. 둘레6,951m, 문지는5개로 동벽과 북벽에 2개, 남벽에 옹문1개가 있고 서벽에는 없다. 옹문은 남벽중앙의 안으로 들어간 지점에 위치하며 성문을 나서면 평탄한 통구하곡에 닿는다. 이 길은 국내성으로 통하던 중요한 통로였다.

환도산성
환도산성

 

산성자산의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여장(성가퀴)도 남아있다. 성의 남쪽에는 통구평야와 압록강이 있고 서쪽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가 있다.
성안의 8각건물지 두동이 나란히 있는데 현재까지 밝혀진 다각형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에는 고구려시대의 고분이 37기가 있다.

환도산성도 성벽을 많이 복원하였고 주변의 변화가 많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지만 중국은 3년이면 바뀐다고 하더니 몇 년 전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왼쪽으로 여전이 물이 흐르고 남문을 들어서니 오른쪽에 성벽을 복원하였고, 왼쪽 개울 건너도 성벽을 복원하였다. 가운데 길을 따라 연화지(음마지)를 오른 쪽으로 돌아 머루 밭을 지나 궁전이 있던 자리로 올라갔는데 장방형건물지만 개방이 되고 우리가 보려고 했던 8각지는 출입금지다. 먼발치에서 담장 너머로 볼 수밖에 없었다. 장방형건물지 아래에 깃대 유적이 있는데 정방형으로 길이는 3.5m, 높이는 0.5m ,너비는 3m이다. 주변은 장방형 석조로 쌓여져있다. 내부에는 작은 돌로 수축한 원형유적이고 직경은 0.5m, 길이는 0.1m이며 깃대의 기초부분이다.

궁전유적- 궁전은 고구려 제10대 산산왕이 198년에 건설한 것으로 3층 계단을 이용하여 산세에 따라 동서방향으로 4줄의 궁전 건축군을 건축하였다. 각층은 석조로 쌓여있다. 계단의 평평함과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면 건축군은 동쪽부터 서쪽까지 깊이는 86.5m, 남쪽부터 북쪽까지 너비는 95.5m이다. 매줄의 건축군은 정방형, 장방형, 팔각형의 건축물이고 건축물마다 배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건축물 주위에는 궁담이 있다. 342년에 전쟁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옆에 큰 배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다. 그래도 하늘은 너무 예쁘다. 되돌아서 전망대인 점장대로 와서 이성산성의 성돌과 아주 똑같은 성돌과 쌓은 모습, 견치석등을 보고 모두들 놀라워했다. 먼저는 점장대 앞에 단이 있어서 그 곳에 올라가서 집안 시내를 내려다 보았는데 이제는 아래서만 볼 수 있었다.

오른쪽에 수졸거주지가 있다. 안내판에 ‘고고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원래 이유적은 전망대의 수졸을 수호하는 주둔지였다. 전망대(점장대)에서 북쪽방향으로 15m거리에 있고 지세가 평탄하며 장방형으로 되어있다. 남북길이는 약 16m, 이고 동서너비는 약9m이며 3줄의 주춧돌이 분포되었다. 밖은 쐐기모양의 석조로 구성되었다.’ 길로만 다니라고 말한 것이 생각나서 수졸주거지(무졸주거지)는 길이 보이지 않아 멀리서만 보았다. 직금은 점장대를 전망대로, 무졸을 수졸로 표기했다. 몇 년 전의 표기와 또 다르다.

산성하고분군(고구려고분박물관)
산성하고분군(고구려고분박물관)

 

내려오며 복원된 음마지(연못-말에게 물을 먹이던 곳)를 살펴보니 문지가 보인다. 오른쪽 점장대 아래로 모퉁이 둥근 성돌이 굴러 떨어진 것이 보인다. 모두들 내려가서 걸음을 재촉하여 산성하고분군으로 갔다. 여러 기를 복원하여 새로운 모습이다. 시간이 없어 고분 안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차에 올랐다. 어제 마트에서 물건 사는 시간은 무한정 주면서 유적지는 시간을 짧게 주니 이게 무슨 경우냐며 말도 안 된다는 불평이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국내성터
국내성터

 

국내성터-서기 3년(유리왕22년)부터 427년(장수왕15년) 까지 약 400여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가 자리했던 곳이다. 졸본성에 이은 고구려 제2의 수도. 석축성이며, 총면적 13000평, 둘레 2,686m, 높이 1-5m, 6개의 성문과 해자가 갖춰져 있다. 성문에는 모두 옹문이 있었고 성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 터 가 있으며 4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치가 설치되어 있다. 석축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토성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왕궁과 관청이 있는 거성 또는 도성으로 추측되며, 유사시에는 국왕과 백성이 이곳에서 북쪽 2.5km지점에 있는 산성자산성으로 피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집안 시내로 들어와서 국내성을 가이드가 알려 주는 대로 바라다보고 압록강변으로 가서 집안시에서 유명한 소불고기를 먹고 압록강으로 가서 배를 타고 선장님의 묘기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잠시 배를 멈춰 북한쪽을 바라보는데 지난 4월 11일에 고골의 금암산에서 많은 진달래꽃을 보며 감탄했는데 여기는 이제서(27일)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민둥산에 붉은 진달래꽃...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다니는 사람, 보초를 서는 사람, 농사를 준비하는 사람 등 매우 가까이에 북한이 보인다. 압록강에도 수양버들이 푸르게 물들고 있다. 상쾌한 압록강의 바람을 맞고 육지로 올라와 압록강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이제 5시간 거리에 있는 단동으로 이동한다. 다시 집안 시내를 지나며 국내성을 가로질러 가며 우측의 미천왕릉(서대묘) 조금 더 가다가 좌측에 천추묘, 더 가다 오른쪽 머루 밭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871호묘가 보이는데 차창 밖으로 바라다보았다. 강을 건너 아주 냄새가 지독한 화장실을 사용하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집안시에는 압록강과 통구하가 있는데 통구하의 물을 먹고 인구는 12만명, 40%가 조선족, 12년 전에 충주시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집안시에는 조선족학교와 유치원이 있다. 한글로 쓰여 있다.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의 하나이고 조선민족은 독립된 민족이다. 집안부터 여순까지는 서간도이다.

박작성(호산장성)
박작성(호산장성)

 

단동은 동쪽에서 제일 처음으로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
천도복숭아가 유명하며 꽃이 피면 천도축제가 열릴 정도라고 한다. 압록강변 단동입구에 들어서니 복숭아밭이 매우 많이 보이고 꽃이 피었는데 사람들이 복숭아 나무 옆에서 사진 찍기 바쁘다. 왼쪽으로 압록강이 보이는데 섬이 진짜 많다. 섬 안에는 민가도 있고 농사도 짓는다. 인공적으로 축대를 쌓은 곳은 중국 땅이고 자연그대로 있는 섬은 북한 땅이란다. 압록강의 물 폭이 1m 밖에 되지 않아 발로 엉덩이를 걷어차면 북한으로 넘어갈 수 있는 곳이 있다기에 믿어지지 않았는데 진짜 보인다.

호산장성(고구려의 박작성)이 있는 산의 모양이 마치 호랑이 한 마리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열하일기의 애하가 바로 이곳이란다. 단체사진 찍으려고 차에서 내리니 바람이 불고 매우 쌀쌀하여 구경하지 못하고 바로 차에 올랐다. 단동은 신발모양의 도시.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했을 때 박작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가며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기게 된 성이었다. 고구려인은 산성을 쌓으면 반드시 산성 안에 우물을 만들었다. 성안에서 전형적인 견치석으로 쌓은 우물이 발견되었다. 지금은 동북공정으로 만리장성의 끝이라고 주장하는데 만리장성은 산해관에서 끝난다.

압록강 신철교와 재래교(단교)
압록강 신철교와 재래교(단교)

 

압록강에는 현재 사용하는 신철교와 재래교(단교)가 나란히 있다. 재래교는 압록강 하구에서 상류로 45km지점에 있다. 1909년에 착공하여 1911년 11월에 준공되었다. 동양제일의 국경명물이었으며 철교의 길이가 당시 가장 길었다. 철교의 일부가 회전식이고 설계제작은 미국에서 하였다. 신철교가 개통되면서 재래교는 인도교로 사용하고 비상시에는 철교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신철교는 재래교에서 상류로 70m 지점에 위치한다. 1943년 5월에 개통되었다. 압록강 철교 근방에 오른쪽마을 입구에 홍수방지 담이 보인다. ‘2010년도에 홍수가 났는데 이 담 때문에 무사히 지나갔다’. 끊어진 철교는 5시까지 입장이 가능한데 우리가 늦게 와서 철교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압록강변 만 돌아보았다. 아주 화려한 한복을 러시아여자인형에게 입혀 놓고 한복을 대여해준다. 고개가 갸우뚱...

어둑어둑해져서 버스에 올라 내일 여순으로 가는 고속도로 근처 단동의 외곽에 있는 숙소로 향하는데 압록강변의 건물들의 불빛이 화려하다. 조금 가니 월량도(압록강의 섬이 달처럼 생겨서)를 지나간다. 산이 안보이고 논이 넓고 레미콘 공장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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