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기념 동북 역사 탐방(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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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기념 동북 역사 탐방(3편)
  • 뉴스투데이24
  • 승인 2019.06.05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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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숙의 중국답사기
김좌진 장군을 만나다

2019년 4월 25일 목요일 맑음(목단강-이도백하)

 

새벽4시 50분경에 호텔 창밖을 보니 회색의 건물 저 멀리서 먼동이 트고 있다. 방안에 책상과 스탠드가 있어 어제 답사한 것 정리하는데 편리했다. 무단장시는 헤이룽장성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지린성 경계지구에 위치(연변 조선족자치주와 접한다)송화강의 가장 큰 지류인 무단강이 시가지를 가로 걸치고 있다.

8시 출발, 말로만 듣던 만주는 아주 넓은 들판이 계속 펼쳐지고 산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쪽에는 논이 많이 보인다. 우리민족이 많이 살고 있나 보다. 해림에서 백야 김좌진장군순국지가 있는 산시진을 가면서 우리나라 새마을운동 하기 이전 모습이 보여서 너무 정겨워 어릴 적 내 고향 상계동(온수동)집 앞 논두렁 밭두렁으로 다니며 봄나물도 캐고, 들꽃도 보며 놀던 생각이 나면서 거닐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김좌진장군 저택
김좌진장군 저택

 

비탈 밭에는 소들이 고삐도 없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모습이 보이고 봄을 맞이하여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모습도 보면서 한적한 시골길을 한참을 달려 김좌진장군저택에 도착했다. 마당에서 겨우살이, 도라지를 말린다. 가이드가 미리 연락을 해서 그곳을 지키고 계시는 노부부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신다. 가이드도 이곳에 오면 고향에 온 느낌이라며 매우 밝은 표정이다. 조국을 위해 어려운 일을 하시는 분들이 이런 시골에 몸을 숨기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쳐 일하시다가 적을 내편인 줄 알고 사람을 잘못 들여 아까운 목숨을 잃은 것을 생각하니 다시 한 번 내 나라의 소중함과 목숨 받쳐 일하신 분들께 고마움과 죄송한 생각이 가득해진다.

마당 입구에 ‘산시중한우의광장’이라고 쓴 큰 돌이 있고 정문은 솟을 대문에 3문으로 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연자방아가 있는데 1927년 말 백야가 항일투쟁의 새로운 국면을 조성코자 이곳 산시로 이전해 온 후 재만 한인들의 경제활동 향상을 위해세운 ‘금성정미소’에서 사용했던 진품유물이다. 1998년 까지 현 위치에 놓여 있어서 구전으로 전해오던 ‘금성정미소’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주는 증거가 된다고 써 있다. 장군의 동상 옆에 ‘대한독립군단 총사령이었던 백야김좌진장군은 1928년 9월부터 이곳에 거주하시면서 1929년 7월에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시고 주석에 취임하여 만주동포들의 연합과 교육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의 항일세력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준비하시던 중, 1930년 1월 24일 이곳에서 순국하시었다’는 안내문이 있다.

장군이 거주하시던 옆방의 팔로회의실에서 김좌진장군을 모시고 전략전술을 의논하고, 그 앞에 우물이 보이고, 장군이 거주하던 방문 위에 단군의 초상화와 12시 반에 시간이 멈춰진 시계, 입으셨던 옷가지, 아궁이에 작은 무쇠 솥, 나무절구, 맷돌, 방안에 작은 상위에 놓인 남포 불, 벽에 장군의 초상화, 일상에 사용하시던 소박한 살림살이, 최소한의 물건으로 최대의 생각을 가지고 생활하셨으리라. 이런 분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호사는 없었으리라. 초가의 굴뚝이 내가 보던 것과는 다른 모습인데 검고 굵은 나무로 되어있었다. 조그만 건물 주변으로 파 등 채소들이 가꾸어져있다. 건물 오른 쪽에 있는 정미소 안에 장군의 순국지 비석이 서있고, 정미소 물품들이 놓여있다.

김좌진장군 연보-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시어 1908년 한성신문이사 취임, 기호흥학회 장학재단 설립, 1909년 오성소학교 설립, 1913년 3년간 (서대문 형무소수감)투옥, 1917년 대한 광복단 조직 단장취임, 1918년 대한독립선언서 선포,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사령관, 1920년 10월 20일청산리 독립전쟁 승전(일본군 3,300명 섬멸), 1921년 대한독립군단 결성, 총사령관취임, 1930년 1월 24일 주중청년협회 회원 박상실에 피살, 1962년 3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장군의 순군장소, 정미소내부
장군의 순군장소, 정미소내부

 

관리실 창문 안에 패랭이꽃을 심은 화분이 보인다. 우리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시던 노부부들 표정이 생각난다. 왔던 길을 되돌아오며 개울에서 빨래하는 모습, 소가 풀 뜯는 모습, 봄을 맞이하는 농부들, 작은 시내에는 학교도 있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농사짓기 전에 논두렁을 태우고 있어 연기가 곳곳에서 나고 있다. 집 옆에는 옥수수대를 가득 쌓아 놓은 모습도 보인다.

장군이 사시던 집
장군이 사시던 집

 

해림시에 있는 한중위의공원(김좌진장군 기념관)에 도착하니 마당에 진달래가 피었고 이빨 빠진 장승이 우리를 맞이 해준다. 이 지역은 김좌진장군과 수많은 독립선열들이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했던 대표적인 지역으로 이곳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중국동포들은 독립선열들의 후손들이며, 아직도 우리말, 우리글을 사용하고 우리문화와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김좌진 장군 동상
김좌진 장군 동상

 

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에서는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한. 중 우호협력과 중국동포들과의 유대 강화 차원에서 ‘한중위의 공원’을 건립하였다. 우리는 건물뒤쪽으로 들어가서 경비원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청산리 전투 그림을 배경으로 장군의 동상이 서있다. 제1관, 참혹한 상처,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의 70년! 일제가 우리를 삼키려 할 때 나라를 지키려는 분들과 을사 5적의 사진, 청일, 러일전쟁,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아야 되고, 되풀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한일 병합에서 해방까지의 이야기를 전시해 놓았다.

제2관, 보라! 그리고 기억하라!! 일제의 잔혹한 만행에 무참히 스러져간 한 맺힌 영혼들을!! 강제징용, 근로정신대, 민중들 대학살, 민족혼 말살, 731부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인간임을 거부하는 일제의 잔혹함!, 위안부 이수단 할머니의 모습과 소녀상이 보인다.
3층에는 독립운동 하신 분들의 사진들과 이야기들이 전시되어있는데 보는 도중 전기불이 꺼져 핸폰 후레쉬를 비추고 겨우 내려왔다. 아마도 우리가 없는 줄 알고 불을 끄셨나보다. 아마도 관람객이 있을 때만 불을 켜나보다.

이제 발해의 도읍 동경성 서경용천부를 향해 떠난다.

흑수말갈에는 우두머리가 없어 대조영을 우두머리로 선택하고 돈화까지 와서 육정산(동모산)에 진국을 세웠다. 당태종이 사신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임명하였다. 나중에 대조영이 서안에가 보니까 마음이 변하여 화룡(서성)에 중경형두바-이때 나라이름을 발해라 했는데 당나라와 마찰이 생겨 조용한 곳으로 피해와 이곳에 수도를 만들었다. 그런데 너무 추워서 다시 중경현도부로 갔다. 다시 동경, 서경, 남경으로 옮겼다. 성벽도 화산석, 화산석이 많다. 남문이 주작문인데 주작이 흑, 백으로 2마리이다. 왕족은 북문으로 출입하고, 신하는 남문으로 출입을 한다. 무덤도 남쪽으로 열린다. (가이드 설명)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에 위치한다. 성 남쪽에는 홀한해(경박호)가 있고 이곳에서 흘러내리는 홀한하(목단강)은 성의 남쪽과 동쪽 및 북쪽의 성벽 밖으로 감돌아 흐른다. 동경성은 발해진의 옛 이름이다.

우물 팔보유리정
우물 팔보유리정

 

전혀 개발이 안 된 한적한 시골에 발해의 도읍이 있다. 주작대로를 걸어 남문에 도착했다. 성벽 옆에 주춧돌이 잘 몰딩된 것이 놓여있다. 성돌이 현문암으로 되어있고, 남문 위에는 문루(옥봉루)가 아주 크게 있었나보다. 주춧돌이 많고 넓다.

중앙에 5개의 궁전건물과 문이 있었고 각건물마다 동서방향으로 회랑이 있고 북쪽으로 외성이 있었다. 기와는 문양이 있고 넓이가 좁은 게 특징이다. 기존에는 밭이었는데 유적지로 지정이 되어 지금은 지난해에 피었던 백일홍이 씨앗을 품고 있다. 성의 가장자리에 서있는 나무에 봄이 찾아와서 연두색으로 물들어있고 안개가 약간 끼어있어 마치 수채화를 보는듯한 풍경이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궁성의 북문지는 건물의 부자재가 모여 있고 그 위로 지붕을 만들었다. 출발하기로 정해진 시간이 닥아 오는데 가이드가 “여기 오기도 어려운데 외성까지 다녀오세요”하는 말에 우리는 너무 기뻐 외성의 북문까지 달리듯이 다녀왔다. 외성은 볼 수 없을까봐 너무 아쉬웠는데 다행이다. 돌아오면서 아까는 남문의 왼쪽으로 왔으니 나갈 때는 보지 못한 반대편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워 눈을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며 담고, 틈틈이 사진도 찍으며 걸으니 내가 마치 기자가 된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남문에 가까이 오니 우물(팔보유리정)이 나왔다. 차에 계신 분들께 미안해서 다음 답사지인 흥륭사에서는 서둘러 다녔다.

흥륭사 발해석등
흥륭사 발해석등

 

주작대로를 따라 약 7분정도 오니 흥륭사에 도착했다. 문화원 이상범사무국장은 “주작대로 따라 오면 흥륭사가 나오니 성의 비보사찰이 아닐까?” 하는 말을 한다. 관음전, 관우전, 대웅전, 삼성전, 뒤로 400년 된 류수와 천년된 류수(느릅나무), 천이백년 된 발해 석등, 우물도 있다.

우물과 느릅나무에는 울긋불긋한 천을 걸어놓고 소원을 빌은 듯하고, 각 건물의 조각상마다 붉은 천을 두른 것은 천년이 넘은 절이어서 붉은 천을 입혔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을 지키고 있는 고마인우의 받침대도 어떤 의미에서인지 4면이 모두 다른 조각이 있다. 삼성전 앞에 6.3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이 있다. 석등의 하대석은 팔각형으로 각 면에 안상을 조각하였고, 기단위에 복련 장식, 중대석도 팔각형이며, 상대석은 양감이 있는 앙련장식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8면이 모두 화창이 뚫려있다. 화사석은 각 모서리마다 주춧돌과 기둥, 주두를 표현하였고, 화창도 위쪽에 창방으로 구획을 나누어 위쪽에 복화반과 공포를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목조건축물의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천년이상 된 석불
천년이상 된 석불

 

상륜부는 팔각지붕에 보주를 올려있다. 상대석과 하대석에 표현된 앙련과 복련장식은 연꽃의 힘차고 강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조각양식의 특징이다. 발해의 불교 조각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천이백년을 지키고 있는데 석등의 조각은 아주 선명하며 두껍고 입체적이다. 이렇게 입체적인 복련, 앙련은 처음 본 것 같다. 이제 고속도로를 타고 이도백하로 출발한다.

한시간 반을 달리니 로백휴게소라고 한글로 써 있다. 육정산은 목단강보다 7도가 낮고, 이도백화는 육정산보다 3도가 낮다, 목단강 부근은 논이 매우 넓고 많다. 연변이 가까워지면서 옥수수 밭이 많이 보인다. 옥수수는 5월 초에 심어서 10월 초에 수확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기 와서 처음으로 옥수수를 심었는데 추워서 싹이 나면 얼어 1921년부터 최씨가 비닐하우스 안에서 모를 부어 어느 정도 자라면 모종을 내자고 건의하여 그렇게 농사짓기 시작했다. 연변은 북간도이며 가장 청정지역이다. 생수는 모두 백두산에서 채취한다. 우리나라의 백산수도. 만주에 논농사가 있으면 우리민족이 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민족은 물을 다룰지 모른다. 중국은 양자강 이남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거리의 이정표가 한글이다 매우 반가웠다. 주변의 풍경도 우리나라와 똑같은데 글씨까지 한글이니......이제 산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산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이유는 등소평이 후손에게 무덤만 물려주게 될까봐 화장제도를 만들며 자기부터 화장하라고 말했다. 중국은 화장증명서가 있어야 사망신고가 된다.

중국의 산아제한은 한족에만 해당되고 소수민족에게는 예외이다. 연변에 교회가 많았는데 탈북자들을 보호해줘서 목사도 잡혀가고 교회도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사람을 넣지 않고 사진을 찍으면 간첩행위이니 조심해야한다. 고속도로를 나오면 공안의 검문이 있는데 시간이 한참 걸린다. 예전의 우리나라와 같은 모습. 며칠 다니면서 보아도 하천에 물이 가득 흐른다. 이곳으로 오면서 고속도로 주변과 산에 자작나무가 매우 많이 보인다. 이도백하로 들어와 보이는 송화강이 얼어있다. 이곳은 진짜 추운가보다. 백두산입장이 8시 반인데 많은 사람이 몰리면 어려우니 출발시간을 7시 반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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